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세상이 암울하다. 내가 비관주의자라 암울한 것만은 아닐 게다. 촛불은 대통령 한 사람을 새롭게 만들어 낸 것으로만 만족하고 이내 꺼져버렸다.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을 단 한 순간이라도 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시민들의 참여로 나타난 촛불로 만든 사회 변혁의 분위기가 쉽사리 죽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대통령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는 간간이 나오지만, 촛불 스스로의 이탈에 대해서는 그 어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새 정부가 뭔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데 대해 무조건 반대하여 발목을 잡는 세력에 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세력이 있기 때문에 적어도 당분간만이라도 대통령과 정부를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에 대해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촛불이 왜 완수되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사회 개혁은 시나브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급격한 혁명을 일으킬 수 있지만, 혁명은 다시 반동으로 돌아가는 것이 역사의 이치다. 그렇다면 완만하게 서서히 이루어내야 하는 사회 개혁은 그것을 추동하는 주체 세력이 지치지 않고 계속 끌고 나가야 한다. 정치의 분야에서 벗어나 사회 전반으로 나아가야 한다.

부산여중생의 폭행을 보고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되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 나아가 모든 잔혹한 범죄의 이면에는 불행한 환경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범죄에 대해 어디까지가 사람의 잘못이고 어디까지가 환경의 잘못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 단지 법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야 한다. 장애인 학교를 서울 강서구 안에 세우는 것이 무슨 죄를 짓는 것이라도 되는 것 마냥, 그 부모들이 무릎을 꿇어야 하는 일에 대해  촛불을 들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런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모두 돈을 숭배하고 따르는 자만 있을 뿐이다. 도처에서 패배적 한탄이 들불 번지듯 한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돈을 사용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들고, 돈을 숭배하기 위해 돈을 쫓고 그 돈을 쫓기 위해 경쟁과 승리의 이데올로기에 환장해 있는 미친 세상의 형국이니 세상이 비관적이라는 거다. 사위가 침잠하다.

흔히 진리는 밝혀지기 마련이라고 한다. 정말 그럴까? 그것은 나약한 인간이 잔인한 현실 앞에서 당위에 대해 갖는 희망일 뿐, 세상을 재현하는 원리가 되지 못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고, 나아가 세상을 구속하는 힘도 전혀 되지 못한다. 진리가 돈과 권력 앞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되어 버렸다.

더 절실히 말 하면, 진리가 밝혀진 적은 거의 없다. 모두가 다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어떤 틀에 가두어진 말의 향연일 뿐이다. 신화가 신화를 낳고 그 신화가 결국 역사로 둔갑을 하는 그 작동 원리의 뻔뻔스러움을 꿰뚫어보는 것이 미친 세상을 고칠 수 있는 여러 길 가운데 중요한 하나라고 보았다. 책상물림의 한계일 수밖에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병은 비관적이지만 그 병을 이기는 방법은 그나마 환자가 희망을 갖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인간과 삶의 가치를 같이 함께 나누고 고민하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다.

이제 마냥 희망을 말하고 노래해서는 안 되는 사회가 되어 있다. 진리고 도덕이고 인간이고 간에 그 당위를 이루어내려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은 적은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안간힘이 힘에 부친다. 그렇다고 비관에 빠져 있을 수는 없다.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한다. 정치를 바꾸는 그런 촛불이 아니라,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그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촛불을 들어야 한다. 그 촛불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작은 목소리를 내고 소리 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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