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문제 물질에 “유독물 아니다” 공표는 위법한 재량권 행사

(사진제공 :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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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국가 측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첫 사례가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9부(부장판사 성지용)는 6일 습기살균제 피해자 김모씨 등 5명이 낸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하고, 국가가 원고 3명에게 300만~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1심과 마찬가지로 국가공무원들이 역학조사를 실시하지 않은 점 등 개별 공무원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위법성을 따지기 어렵다고 봤다. 하지만 문제가 된 물질에 대한 유해성 심사, 그리고 공표 과정에서 일정부분 재량권을 행사한 것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상실한 위법 행위라고 판단했다.

대표적인 예로, 환경부 등이 충분한 유해성 심사를 거치지 않은 채, 관련 물질에 대해 ‘유독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고시하고 이를 수정하지 않은 것은 법을 어긴 재량권 행사라고 판단한 것이다.

재판부는 “재량권 행사가 직무상 의무 위반인지 판단함에 있어 법령이 재량권을 부여한 취지, 재량권 행사가 국민 건강에 미치는 영향, 헌법상 국가의 국민 보건 보호의무를 비롯한 국가의 책무 등도 고려돼야 한다”고 전제했다.

이어 “화학물질 심사 단계에서 독성이나 위해성에 대한 일반적인 심사가 평가되거나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는데도, 환경부 등은 해당 물질을 유독 물질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일반화해 공표했다”며 “국가가 안전성을 보장한 것과 같은 외관이 형성됐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이로 인해 화학물질들이 별다른 규제 없이 수입·유통됐고, 제조사는 이를 원료로 사용한 제품을 광고하면서 이를 믿은 소비자들이 제품을 구매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며 “마치 정부가 안전성을 검증한 것처럼 외관을 형성한 것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특히 가습기살균제 사건으로 인해 피해를 신고한 신고자가 7,685명, 사망자는 1,751명에 달한다는 점을 설명하며 “환경부 등은 해당 물질의 용도와 방법을 제한 없이 공표할 경우 국민 건강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예견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에 따라 동일한 사유로 구제급여를 받은 경우 이를 제하고 국가 측 배상액을 산정했다고 설명했다. 이 사건 원고 2명의 경우 관련법상 구제급여조정금 일부를 받아 위자료 청구권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본 반면, 나머지 3명의 경우 이를 지급받지 않아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참고로, 김씨 등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가습기살균제를 구매 후 사용하다 폐질환 등으로 피해를 입었다며 제조업체와 국가를 상대로 2014년 8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됐으나, 원고 중 일부가 항소를 진행하면서 2심으로 이어졌다.

항소심 재판부가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하면서, 이날 판결은 가습기살균제 사건에서 국가 배상 책임이 인정된 첫 사례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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